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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소포가 왔다. 웬만한 용무는 이메일로 주고받는 세상에,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을 또렷한 손 글씨로 적은 소포였기에 더 반가웠다.     그 안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뉴욕에서 사역하는 선배 목사가 보낸 책이었다. 40년 넘게 목회하면서 매주 정성껏 빚어낸 설교문을 하루 한 편씩 묵상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30분 설교문을 300자로 요약했다며, 서두르지 말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저자의 친절한 조언도 잠시,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책 속에 녹아있는 이민 목회 현장의 생생한 소리, 신앙인의 깊은 고뇌가 책을 덮지 못하게 했다.   책 속에서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였다.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인물이다. 킹 목사와 함께 17번이나 감옥에 투옥되었고, 셀마 행진에도 동행했던 그였다. 킹 목사가 암살당하기 전날 밤에는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바로 옆방에 머물렀으며, 총에 맞아 쓰러진 킹 목사를 부둥켜안고 병원까지 갔던 이도 애버내시였다.   한때 그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로 불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 중에는 UN 대사나 애틀란타 시장이 된 이도 있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명예나 박수갈채가 아닌, 오직 소명에 충실한 길을 걸었다. 그 삶의 진가는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드러날 뿐이었다.   얼마 전 애틀랜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킹 목사 박물관을 찾아 애버내시의 흔적을 살펴보려 했지만, 박물관은 리모델링을 한다며 문이 닫혀 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니, 애틀랜타 다운타운을 지나는 프리웨이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고, 또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지역에도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고,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을 지나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냥 한번 가볼 걸’하는 아쉬움이 맴돌던 어느 날, 그의 이름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 순간, 믿기 힘든 사실과 마주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이 바로 교회 옆에 있었다.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닿는 거리.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그토록 멀리서 찾던 길이 사실은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애버내시의 이름이 새겨진 도로를, 햇살이 드리우고, 들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인도를 천천히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행복과 진리, 사랑과 은혜는 늘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필요한 건 주위를 먼저 살피는 것이었다는 것을.   애버내시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I Tried(나는 한번 해 봤다)’.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번 해 봤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과 겸손한 헌신이 깃든 발자취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길 위에서 조용하지만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광장 목사 박물관 이의 이름 이름 하나

2025-04-2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목련이, 개나리가 피고 홍매화 꽃눈 방울처럼 달렸습니다 봄 하늘 바라보다 눈물이 맺힙니다 수척해진 얼굴, 내 탓만 같아 미안했습니다 애간장 아랑곳 없이 봄은 늦게, 느리게 오고 있습니다     당신을 알게 된 호수는 아름다워 닿을 수 없는 그곳엔 종일 달빛 마음 출렁이고 예상 못한 일들, 바람 불듯 일어나기도 하고 꽃 지듯 사라지기도 하였지요 푸른 호수와 푸른 하늘이 붙어버린 저녁 서로의 안부를 묻기엔 너무 멀리 흘렀나 봅니다     꽃 지듯, 나뭇잎 떨어지듯, 아무 일도 없었듯이 세월 지나 덤덤히 목련이 피고   목련이 떨어질 즈음 나도 없겠지요   살다 보면 눈물이 마르도록 어제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내일이 되어 있을 터이니   안국역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차마 무겁습니다   별이 무수리 떨어져 안기는 밤 멀리서 바퀴 소리가 나를 지나쳐 웁니다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듯 서쪽하늘의 노을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쉼 없이 이어지는 분주함 속에서 저녁 한때 깊숙히 의자에 몸을 맡긴 채 고요히 내려앉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느새 내 마음에도 서서히 노을이 지고 고요가 잠겨옵니다.   하늘 빛이 옅은 붉은빛으로 변해가다 어느 사이 하늘은 옅은 보라빛을 띠기 시작합니다. 이때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오는 노을 빛은 천상의 색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는 신비한 빛입니다. 노을빛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귀에 가득했던 분주한 소리들이 하나 둘 지워지고 이제 들리는 소리는 거의 없습니다. 보금자리 찿아 날갯짓을 펴는 새들의 노래가 간간이 들려오고 바람에 젖는 풀들의 나즈막한 속삭임이 들립니다. 나는 지금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고요 속에 있습니다. 먼곳에서 졸리운 듯 들리는 자동차 달리는 소리며, 내 안에 흙탕물이 서서히 침잠하는 고요 속에서 사과꽃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높아지기에 턱없이 작은 우리이기에 오히려 낮아지는 동작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더 깊어지기 위해 넘어짐과 상처와 경솔함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같은 일을 반복해서 실수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나를 향한 용서가 우선되야합니다. 그런 후에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바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노을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입니다. 언제 그 이름이 내 마음에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 안에 들어와 시간과 환경과 풍경이 바뀔 때마다 그 이름은 풍선처럼 내속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 이름 하나 품고 노을 속으로 깊어 가자면 나뭇가지 사이 반짝 보이는 얼굴과 바람에 실려온 반가운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작은 가슴에 다 담을 수 없는 미어지는 아픔을 행복이라고 아직 말하고 싶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이름 이름 하나 달빛 마음 바퀴 소리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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